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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조선 독립의 당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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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행 무기 밀매 사건



1667년 일본 나가사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주범은 이토 코자에몬, 그 죄목은 조선에 무기를 판 것이었다.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이토 코자에몬의 밀무역 사건이었습니다. 
김문경 교수 ㅣ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 밀고한 사람이 있어서 일본쪽에서 알게 된거죠. 무려 90명이 체포 돼서 극형을 당한 겁니다.

일본에서 발각된 사상 최대의 무기 밀매단 사건. 그들이 무기를 팔아넘긴 곳은 조선, 조선 또한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본 열도를 뒤흔든 대규모 무기 밀수 사건. 17세기 조선과 일본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곳은 일본의 항구도시 나가사키다. 17세기 이곳 나가사키는 동북아 무역의 중심지이자 일본으로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창구였다.

당시 외국과의 교역은 일본 막부에 의해서 엄격하게 관리 되었는데 1667년 나가사키에서 엄청난 밀수 사건이 발생한다.

대규모 밀수 조직이 당시 수출 금지품목이었던 일본의 무기를 팔아넘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기를 판 곳은 바로 조선이었다.

약 350여년 전 이곳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일본 열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나가사키는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다.

다른 곳에서는 이미 운행이 중단된 백 년이 넘은 전차들이 여전히 도심을 누비고 다닌다.

나가사키에서 무기밀매단이 발각된 것은 1667년, 당시의 사건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다.

17세기,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범죄사건을 기록해놓은 책이 있다. 무기밀수사건의 전말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이 사료는 범과장이다. 
오카모토 켄이치로 연구원 ㅣ 나가사키역사문화박물관 : 이것은 ‘범과장’으로 에도시대 나가사키를 통치하던 나가사키부 봉행소의 재판기록입니다.

나가사키 주변에서 벌어진 밀무역이나 도시에서 일어난 싸움 등을 포함한 다양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나가사키 봉행이라는 책임자가 판결을

내린 당시의 기록물입니다.

범과장에 처음 등장하는 범죄 기록이라는 이토 코자에만이라는 자가 주도한 무기밀수사건. 
오카모토 켄이치로 연구원 ㅣ 나가사키역사문화박물관 : 에도시대 초기의 가장 큰 사건을 들면 역시 이토 코자에몬 사건으로

이 기록물에 맨 처음 실린 것도 그 사실을 방증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두께도 두꺼워 약 30년간의 기록을 정리한 것 중에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토 코자에만 사건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관련자 숫자나 규모로 볼 때 1667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근세 최대급 밀수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모두 100명,

그 중 무려 43명이 사형을 당했다. 주범들의 경우 그 자식들까지 참형을 면치 못했다.

죄인들의 죄목은 조선에 무기류를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주범 이토 코자에몬에 대한 재판기록은 그들이 조선에 무기를 팔아넘긴 시기를 명시하고 있다.

묘진양년, 이는 1663년과 1664년에 해당한다. 
그 시기 밀수사건과 관련해 조선측 자료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밀수를 뜻하는 잠상, 밀매, 잠매 등의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1660년대 중반 정상적인 무역이 아닌 비합법적인 상단으로부터 무기류를 구입했다는 기사는 모두 6건이었다. 
이토 코자에몬이 무기 밀매에 나섰던 1663년, 우리측 기록은 화약의 재료인 유황을 실은 일본선이 가덕진에 나타났다고 전한다. 
작년 가을(1663년) 왜인들이 유황 1만 3천 6백여 석을 싣고 어둠을 틈타 가덕도에 정박하였다
- 비변사등록 현종5년(1664) -

일본의 밀수선이 들어왔다는 가덕도. 당시 가덕도는 일본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이런 이유로 가덕도는 늘 왜구의 침입에 시달렸고 임진왜란 발발의 첫 봉화를 올린 것도 가덕도였다. 지금은 흔적만 겨우 남은 성벽은

이곳이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전진기지였음을 말해준다. 
전재문 이사 ㅣ 부산강서문화원 : 이곳은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나 군사적으로 최고 요충지이고 최전방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휴전선 최전방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가덕도는 왜적들의 침입에 시달려온 장소입니다.

조선 말까지 군사가 주둔했던 가덕도. 섬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연대봉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남아있다.

봉수대에서는 남해섬들과 부산 그리고 일본 대마도까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부산항 입구에 위치하면서 대마도를 마주보고 있는 가덕도. 가덕도는 이러한 지형적 특징으로 일본 밀수 선박의 주요통로가 되었다. 
전재문 이사 ㅣ 부산강서문화원 : 부산포와 대마도 사이에 선박 접안이 용이한 곳이 가덕도입니다. 
가덕도 뿐 아니라 남해안의 가까운 섬들은 일본 밀매단에게 좋은 은신처이자 접선지가 되었다.

1665년에는 일본인들이 탄 배가 몰래 용초도로 들어왔다. 
왜인들이 탄 배 한 척이 몰래 용초도에 정박하다
- 현종개수실록 6년(1665) -

거제도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 용초도. 적막을 깨우는 사건이 일어난다. 수상한 선박의 출현은 곧 관청에 보고됐다.

확인된 결과, 배에 탙 이들은 일본의 상인이었다. 이들이 가득 싣고 온 물건은 바로 일본의 무기들.

배에는 다양한 일본제 무기들과 전쟁물자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화약의 재료인 석유황, 활을 만드는 필수적인 흑각, 그리고 조총과 장검 등이었다.

그런데 용초도에 정박한 일본 상인들은 누군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들이 찾는 사람은 임주부와 피봉사였다. 
김동철 교수 ㅣ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 : 주부와 봉사는 당시 조선의 하층관직 이름입니다.

실제 이 사람들이 이 이름을 썼다기보다는 아마 요즘 주사라든지 사장님이라고 부르듯이 관용적으로 쓰이는 호칭입니다. 
연락을 받은 임주부와 피봉사는 일본 밀수섬으로 향했다. 이들은 익숙하게 일본인들과 거래를 했다. 일본밀수선과의 거래가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 밀수단의 조선측 파트너는 피기문, 임지죽이란 이름의 상인들이었다. 1660년대 중반, 남해안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일본제 무기류 밀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 남겨진 사료와 정황을 종합해보면 일본의 1660년대 밀무역조직은 조선까지 불법적으로 투항해 와 대량의 일본제 무기를 팔아넘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일본인들도 직접적으로 이름을 거론할 정도로 조선에서 밀무역품을 지속적으로 사들인 자들이 있었다는 것인데 당시 유황과 같은 무기류들은 일반상인이 다루기에 제약이 따랐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무기 밀매에 손을 댄 것일까?
밀수가 아닌 정상적인 일본과의 무역은 왜관에서 이루어졌다. 무기밀수사건이 일어난 1660년대에 일본과의 교역이 이루어진 곳은 두모포 왜관. 당시 두모포 왜관은 부산 동부, 지금의 수정시장 자리에 위치해있었는데 나중에 왜관이 초량으로 옮겨가면서 이 일대는 구관으로 불렸다.

현재는 길 이름으로만 남아있지만 두모포 왜관이 있던 당시 이 일대는 모두 바다였다. 두모포 왜관은 부산진성 동쪽으로 바다를 낀 위치에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교역을 재개하면서 문을 열었던 왜관이 절영도에서 두모포로 옮겨가 있던 시점이었다.

김동철 교수 ㅣ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 : 조선과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에 무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1601년부터 부산 영도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부터였으므로 거의 20년 동안은 왜관에서 공식적으로 무역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고 1601년~1607년까지는 영도입니다만 1607년~16078년까지는

지금 부산 동구청에 있었던 두모포 왜관이라는 곳에서 이뤄졌습니다.

두모포 왜관의 대청이라고 하는 곳에서 무기의 거래가 공식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왜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두모포 왜관은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초량왜관을 그린 그림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왜관에는 무역선이 드나들 수 있는 선창과 실제 거래가 이루어지던 개시대청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왜관에서는 일본인과의 무역거래가 5일장으로 열렸다. 이때 허가받은 상인들만 왜관에 들어가 물건을 사고팔 수 있었다.

왜관에서의 무역거래는 철저한 관리와 감시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왜관 안에서도 밀수사건은 가끔 일어났고 조정의 처벌은 엄격했다. 
동래에서 밀무역한 상인 임소의 목을 베고 효시하다
- 인조실록 1년(1623) -

그런데 왜관 밖에서 일어난 이번 밀수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달랐다. 무기밀수를 둘러싸고 조정 내 의견이 분분했다. 
호조판서 정치화
밀무역은 저들 나라가 엄중히 금하는 것입니다.
어찌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키지 않겠습니까?
- 현종실록 6년(1665) -
반면 좌의정 원두표은 달랐다. 
좌의정 원두표
유황 1백 근 값이 은화 70냥에 불과하고 앞으로 더 내릴 것이므로 이 길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 현종실록 5년(1664) -

무기밀수를 두고 조정이 혼란스럽던 그 시기, 왕명으로 설치된 군사조직 훈련도감에서는 새로운 계획이 도모되고 있었다.

훈련도감 대장 이완이 직접 상인에게 지시해 유황을 구할 길을 찾으라 지시한 것이다. 밀수를 지시한 것이다. 
훈련도감 대장 이완이 서울 사람 이응상에게 분부하여 사람을 동래에 보내 유황이 생길 수 있는 길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 비변사등록 현종5년(1664) - 
김문경 교수 ㅣ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 훈련대장 이완과 좌의정 원두표는 소위 북벌정책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정책을 수행한 책임자들입니다.

이 두 사람이 직접 지시를 내려서 그러니까 국왕도 그때 알고 있었던 거죠. 이 사실을.

적이 번번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은 오로지 화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나라의 약점은 바로 화포를 사용하지 못하는데 있다 - 선조실록 26년(1593) -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신무기에 대한 중요성을 절감했다. 임진왜란 초기, 전세를 제압한 것은 일본군의 우수한 조총이었다.

삼수병 체제 : 포수(조총), 살수(검), 사수(활)로 이루어진 보병체제
이후 병자호란에서도 크게 패하며 치욕을 당한 조선에선 하나의 이념이 싹텄다.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다. 이를 위해 군을 강화했다.

훈련도감을 포수, 살수, 사수로 이루어진 삼수병 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총기를 개량하고 조총병 양성에 힘을 쏟았다. 
박재광 학예연구관 ㅣ 전쟁기념관 : 17~18세기가 되면 조총이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런 형태로 발전하게 되죠.

반면 삼수병 중에서 사수(활)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비중이 점점 떨어지죠.

기병위주의 편제와 전술체계를 가졌던 조선군이 전쟁 이후 급속히 조총보병 위주로 체제를 바꾼 것이다.

이러한 조선군 전술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8년, 장양공 이일이 여진족 마을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 전투상황이 잘 표현된 이 그림에서 조선군은 기병이 주력이다. 기병을 중심으로 여진족 마을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다.

무기도 기병의 주무기인 월도와 활을 든 병사들이 주로 보인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 장양공 이일이 함경도 지역을 침략하던 여진족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로부터 30년 후에 또다른 기록에서는 변화한 조선군의 양상이 잘 드러난다.

1619년, 명을 도와 후금을 치기 위해 나선 조선군은 심양 부근에서 후금군과 맞서게 된다. 이때 장면을 그린 그림이 파진대적도다.

이 그림에 보이는 조선군은 조총병을 전면에 포진한 보병부대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은 그 체제와 전술을 급격히 조총 보병 위주로 재편한 것이다.
충렬록 : 조선의 무신 김응하의 전승을 기리는 문집
파진대적도 : 1619년 김응하가 지휘하는 조선 원정군이 후금군과 맞선 장면을 그린 그림
박재광 학예연구관 ㅣ 전쟁기념관 : 조총병의 전술적인 비중이 핵심병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물론 심하전투에 나갔을 대 조선군 병력편성을 보면 포수도, 살수도, 사수도 있지만 핵심적으로 기능하는 병력이 결국 포수였다는 것을 그림에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석유황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데...
저축된 것이 없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 비변사등록 현종 5년(1664) -
전술변화로 조총의 수가 늘면서 조총에 들어가는 화약의 수요도 증가했다. 그런데 화약의 핵심재료인 유황은 조선에서는 나지 않아 귀했다.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 ㅣ 릿쿄대학교 사학과 : 이 시기 마침 조선은 총을 중심으로 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병제개혁에 나선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총에 넣기 위한 화약이 필요했죠. 그보다 몇 년 전에는 도쿠가와 막부도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 다량의 유황을 조선에 수출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총, 화약, 그리고 화약을 만들기 위한 유황을 조선에서 원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황의 최대생산지는 일본이었다. 화산지대가 넓게 분포한 일본에는 유황광산이 많았다. 채굴도 쉬워 각지에서 유황이 생산됐다.

아예 유황산이라 이름붙여진 이곳에선 아직도 화산 활동이 활발하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곳곳에는 유황광산이 있었다.

인근 화산지대에 위치한 노천온천. 유황성분이 포함된 수증기가 쉴새없이 뿜어져 나온다. 돌에 노랗게 침착된 성분이 바로 유황이다.

순도가 높은 유황석의 경우는 돌 전체가 노란색을 띤다. 17세기 일본의 밀매단이 조선으로 팔아넘긴 무기류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 유황이었다.

신전자초방에 따른 화약재료 혼합비율 - 유회 7 : 유황 15 : 염초 78
화약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버드나무 숯인 유해와 염초, 유황 세가지 원료가 필요하다.

이를 이용해 17세기 사용했던 흑색화약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화약제조법을 밝힌 당시의 병서 신전자초방에 근거해 유회, 유황, 염초를 7:15:78로 배합했다.

민병만 ㅣ 한화기념관장 : 염초와 숯, 유황 세 가지를 섞어서 만들었던 흑색화약의 일종인데 그중에 유황은 흑색화약의 환원제, 연료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산화제로 쓰이는 염초와 비율이 적절하게 맞아야 되는데 유황이 덜 들어가면 화약의 위력이 현격히 떨어지고 차이가 납니다.

실제 화약의 위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정상비율의 화약과 유황을 절반만 넣은 화약을 준비했다.

두가지 화약에 불을 붙여 폭발력을 비교해보는 실험이다. 화약을 점화시키자 둘다 강한 불꽃을 내며 타올랐다.

타는 속도와 자국은 차이가 컸다.

유황이 적게 들어간 화약은 타는 속도가 느렸다. 폭발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유황은 화약의 위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원료인 것이다. 따라서 유황부족은 전력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이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김동철 교수 ㅣ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 : 유황이나 염초의 경우에는 외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로 염초는 중국에서 많이 생산됐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서 많이 수입되고 유황은 일본이 화산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로 일본을 통해서 많이 수입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무기류를 다른 나라에 팔아 넘겨서는 안된다
- 1621년의 무기금수조치 봉서 -
북벌의 기치 아래 군사력을 강화하던 그 시기, 유황확보에 제동이 걸린 사건이 발생한다.

1621년, 일본에서 무기나 군수물자는 더이상 외국에 팔아넘겨서는 안된다는 이른바 무기금수조치가 내려졌다.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조선에서도 일본의 무기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1620년대 초에 막부가 일본제 무기류의 수출 금지령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무기류를 구입하기가 힘들어지는 상황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1667년,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대규모 처형사건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조선의 수요는 많은데 정상적인 수출의 길이 끊기자 일본 내에서 밀매조직이 생겨난 것이다.

무역항인 나가사키의 이토 코자에몬을 중심으로 오사카, 대마도 등 광범한 지역에 달하는 거대한 밀매조직이 형성됐다.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 ㅣ 릿쿄대학교 사학과 :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규슈 사람들은 나가사키와 무역 등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죠.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무역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었다는 거죠. 상품 유통은 인간의 왕래, 인간의 교류와도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가사키, 하카타를 중심으로 규슈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출신자들이 연루된 겁니다.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일본에서 막부가 일본제 무기류의 수출을 금지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서 수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졌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결국 비공식적 통로로 유황을 구입할 수밖에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 측에서 비공식적 통로를 통한 유황구입을 지시하게 되지요.

17세기 무기밀수는 일본 무기류를 필요로 하는 조선정부로부터 시작됐다.

무기류 구입 의사가 상인이나 역관을 통해 일본측에 전달되면 일본의 밀매조직이 물건을 확보해 조선에 넘긴 것이다. 
김근행은 자급을 더해주고, 김덕생은 면천해주며 임지죽 등은 모두 통정첩을 주라
- 비변사등록 현종 6년(1665) -
은밀하게 진행된 일련의 무기밀수과정. 조선의 왕은 어디까지 관여하고 있었을까? 실록에는 밀수관련자들에 관한 포상기록이 전한다.

훈련도감에 무기밀수 지시의 배경에는 임금이 있었다. 북벌의 꿈을 키우던 17세기 조선, 부족한 무기와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임금과 조정이 같이 나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무기밀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660년대 조선조정은 일본의 무기류와 유황을 밀수를 통해서라도 구입하고자 했다.

이에 일본에서는 대규모 밀매조직이 형성됐고 이들은 무기류를 실어와 조선에 팔아 넘긴다.

이러한 일련의 밀매는 1667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무기밀매조직이 적발되면서 막을 내린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토 코자에몬이라는 지금의 재벌에 해당하는 거상이 개입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일본 사회에 커다란 파장이 일게 된다.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묘락사. 이 절은 무기밀매사건의 주모자로 처형된 이토 코자에몬의 가문과 인연이 깊다. 
이 그림이 처형된 2대 코자에몬의 초상화입니다.
2대 코자에몬은 처형당한 탓에 초상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코자에몬의 얼굴을 근거로 그린 것입니다.

초상화를 그려 고이 모셔둘 만큼 이 절에서는 이토 코자에몬의 예우가 각별했다.

이토 코자에몬의 부모는 이 절에 많은 재산을 시주하고 대대로 묘와 위패를 모시는 가문의 사찰로 삼았다.

와타나베 키오도오 주지 ㅣ 묘락사 : 이 묘의 주인은 처형당한 이토 코자에몬입니다. 이토 코자에몬은 나가사키에서 처형당했는데요.

이곳 묘락사의 주지스님인 잇보화상이 코자에몬의 시체를 인수하여 그의 아버지 묘 옆에 매장했습니다.

이토 코자에몬은 이곳 후쿠오카의 상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상인이었습니다.

그래서 3대 번주인 구로다 미쓰유키는 그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고 후쿠오카의 재정을 뒷받침했습니다.

즉 밀무역을 통해 이익을 올려 이곳 후쿠오카의 재정을 뒷받침했던 거죠. 그래서 후쿠오카에서 볼 때는 은혜를 많이 입은 상인이었습니다. 
비록 밀수에 손대기는 했지만 무역업을 활발히 했던 이토 코자에몬은 후쿠오카를 국제무역항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1998년에는 후쿠오카 상인들이 이토 코자에몬과 함께 처형당한 그의 아들을 애도하는 비석까지 세웠다.

이토 코자에몬에 관해 평생을 연구한 다케노 요오코 교수.

그녀는 이토 코자에몬이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무역활동을 펼쳤고 이를 통해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주장한다. 
다케노 요오코 명예교수 ㅣ 후쿠오카대학 : 그러니까 거부였습니다. 막부의 예산보다 재산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아시겠죠? 일본 막부보다 훨씬 돈이 많았다는 거죠.

당시 일반적으로는 일본의 부자 중 은 1천 관을 가지고 있으면 엄청난 부자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7천 관이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죠. 일본 최고를 넘어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거부였던 셈이죠.

이토 코자에몬의 출신지로 알려진 기타규슈시 고야노세 마을. 과거 이곳은 오사카와 나가사키를 잇는 가장 중요한 역참마을이었다.

800m에 달하는 이 거리는 역참마을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토 코자에몬 집안은 이 마을의 초기 번영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후쿠오카로 다시 나가사키로 진출해 사업을 확장한다.

최근 들어선 고야노세 기념관에는 이토 코자에몬의 전시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토 코자에몬이 후쿠오카를 발전시키고 해양무역업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마츠오 요시미 ㅣ 향토사학자 : 이토 코자에몬의 무역활동은 쌀 뿐만 아니라 철 등 넓은 범위의 물품을 이용해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대마도, 조선 등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배를 이용한 무역업을 했습니다.

이토 코자에몬 49세, 1667년 6월 25일 체포
이 자는 다른 자들과 공모하여 조선국에 무기를 팔았다
11월 그뭄날 책형에 처했다
거상으로 이름 떨치던 이토 코자에몬. 그러나 조선과의 무기밀수가 발각되면서 그의 운명도 끝이 났다.

이토 코자에몬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조선과의 무기밀수에 가담했다가 처형을 당했다. 당시 체포된 사람만 94명.

이중 이토 코자에몬을 비롯한 주동자 5명에게는 하리츠케, 즉 책형이 내려졌다.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 ㅣ 릿쿄대학교 사학과 : 남자는 속옷 한 장만 입히고 십자가에 매달아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늑골 아래로 창을 깊숙이 찔러 죽이는 처형방식이었습니다. 사형 자체가 극형이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책형은 상당히 잔혹했죠.

이렇게 매달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처형됐기 때문에 본보기를 보이는 의미도 담고 있었습니다. 역시 잔혹한 처벌방식이었죠.

책형은 죄인을 십자가형틀에 묶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이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책형은 반역자나 주인을 살해한 노예, 부모를 죽인 패륜에 적용하던 형벌이었다.

밀수를 했다는 죄목으로 책형이 내려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막부는 당시 무기밀수를 일종의 반역행위로 규정한 것이었다.

당시 책형이 행해졌던 곳은 현재 26성인기념관이 들어선 자리다. 바닷가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에도막부시대 기독교 신자들의 처형장소로도 쓰였다. 
렌조 루카 ㅣ 26성인기념관장 : 당시 바다를 통해 출입하던 외국 선박들이 볼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좁은 길이 ‘우라카미가도’로 나가사키와 우라카미를 잇는 가도였기 때문에 이곳은 꼭 지나칠 수밖에 없던 길이었죠.

(그래서) 본보기를 보이는 데는 안성맞춤인 곳이었죠.

예를 들어 사형을 당한 시체의 머리만을 내걸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매우 눈에 띄는 장소를 처형지로 선정했던 거죠.

가장 잔혹한 사형방식인 책형. 무기 밀거래를 한 자들에게 책형을 가할 만큼 당시 처벌이 엄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쇄국정책이 확고한 국법으로 정립된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난 후로

막부의 정치가 안정기로 들어간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막부로서도 쇄국령을 어긴 이러한 밀매조직을 아주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특히 일본 막부는 거상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토 코자에몬을 책형에 처하면서 철저한 본보기로 삼고자 한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동아시아 정세를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갔던 이토 코자에몬.

조선의 유황과 무기를 몰래 팔았다는 이유로 결국 가혹한 형벌로 삶을 마감했다. 
전에 나가사키에 이토라는 큰 부자가 있었다
밀수는 원래 이 부자가 시작했는데 무기를 조선에 가지고 가서 팔았다
이토 코자에몬이 죽은 후에도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자주 거론했다.

최근에는 중국어 교과서에도 그의 이야기가 실려있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당통사심득, 에도막부시대 중국어 통역사 교육을 위한 책으로 쓰였다.

여기도 조선에 무기를 판 이토 코자에몬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김문경 교수 ㅣ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 이토 사건이, 그 밀수 사건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 때는 나가사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것이 교과서에 나온 이유는 통역들에게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 이토 코자에몬은 굉장히 부자였는데 아무 불편이 없는데

욕심을 부려서 조선과 밀무역을 했다 그것도 한두 번으로 그만두었으면 안 들켰을텐데 열 몇 번 했기 때문에 들켜서 사형을 당했다

그래서 사람은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 그런 취지로 이 교과서에는 게재되어 있습니다.

일본 막부는 조선에 무기를 팔아넘긴 이토 코자에몬 사건을 두고 두고 후세에 경계로 삼고자 했다.

또한 이 사건은 일본인 가담자에 대한 처벌로만 끝나지 않았다.

일본막부는 조선정부에 사건의 진상규명과 조선측 관련자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다.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 ㅣ 릿쿄대학교 사학과 : 조선은 끝끝내 그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대신에 차선책을 택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 대신에 이전부터 쓰시마번이 요구해 왔던 왜관의 이전, 즉 두모포에서 좀 더 조건이 좋은 곳으로의 이전을 허가합니다. 그 결과 초량왜관이 설립됩니다.

이의립을 시켜 제련하게 하여 유황을 취했는데 색과 품질이 같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상을 베풀어 장려해야 하겠습니다
- 현종개수실록 4년(1663) -
이토 코자에몬 사건 이후 조선은 더이상 일본을 통해 화약재료인 유황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유황광산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만호봉에서 유황을 얻다
- 현종 10년(1669) -
당시 유황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이의립이다. 이의립은 조선의 뛰어난 기술자였다.

무기밀수사건이 일어나던 당시 이의립은 전국의 산을 헤매며 유황광산 개발에 매달렸다.

결국 그는 1669년 경주 만호봉에서 유황광산을 발견했다.

만호봉은 경주 토함산 북서쪽에 있는 높이 500여미터의 봉우리다. 만호봉에 유황광산 흔적이 남아있을까?

정상 가까이 올라가면 경주 주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화산석이 발견된다.

유황성분이 포함된 화산석은 이 일대에서는 오직 만호봉에서만 발견된다.

만호봉 정상부를 뒤덮은 화산석들, 이의립이 유황산을 찾은 것도 이 부근일 것이다.

이의립은 이곳 만호봉에서 유황산을 발견하고 스스로 터득한 자취법을 통해 유황을 추출해냈다. 조선에서도 유황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그 공을 인정해 현종은 이의립에서 구충당이라는 호를 하사하고 벼슬을 내렸다.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가장 문제시됐던 유황광산 개발이 17세기 말 이후에 본격화되면서 더 이상 일본으로부터

비공식적 통로를 통해서까지 유황을 구입해야 될 이유가 없어진 것이죠. 
국내에서 유황이 생산되면서 조선의 고민은 해결됐다. 이후 조정이 주도하는 국가차원의 밀수도 더이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황광산의 개발로 유황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조선은 더이상 일본으로부터의 밀수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밀수를 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화약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임금과 조정이 무기와 밀수에 나섰던 희대의 사건.

17세기 최대의 무기 밀수사건은 동아시아 전체를 거대한 전쟁으로 끌고 들어갔던 일본과 두 차례나 한반도를 유린했던 신흥강국 청나라,

두 강국 사이에서 다급하게 자주 국방을 이루고자 했던 약소국 조선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었다.

개드립 - 펌) 17세기 일본을 뒤흔든 조선행 무기 밀매사건 ( http://www.dogdrip.net/93238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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