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 화폐의 역사

 

 

 

 

 

 

 

 

 

 

 

 

 

 

우리나라의 화폐제도는 관리통화제도(planned monetary system)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관리통화제는 통화를, 즉! 돈을 정부와 중앙은행(한국은행)이 자유재량으로 조절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이 어느 특정한 본위(本位)[금gold, 은, 금화 등]와 결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본위제 라고도 합니다. 다시말해 금(gold)이나, 금화, 은, 금환 등 처럼
특정한 금속의 일정량과 화폐의 일정량이 결부되어진 구속본위제(금본위제)와는 다른 화폐제도인 것입니다.

오래전에는 금속 자체가 화폐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금속 중에서도 주로 금(gold)이 화폐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렇게 금속(gold) 자체가 화폐역할을 했던 것을 금속화폐 라고 합니다.
하지만, 금속화폐는 거래를 할때마다 일일이 모양과 무게를 측정하고 따져야 했기 때문에
많은 불편함이 존재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형태의 화폐를 칭량화폐(秤量貨幣) 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래의 불편을 덜고 화폐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정한 양의 금속과
일정한 모양으로 금속을 주조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주조화폐(鑄造貨幣)입니다.
즉,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500원, 100원 동전처럼 크기와 모양과, 금속의 함유량을 일정하게 하여 화폐를 만든것입니다.

초창기 주조화폐에는 재료로 쓰인 금속의 가치와 화폐의 명목(액면)가치가 같았습니다. 다시말해
주조화폐가 금화(gold) 였다고 가정하고, 금화 액면에 100원 이라고 쓰여있었다면
그 금화를 만들기위해 사용된 금(gold)의 양 자체도 100원어치가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조화폐의 가치와 재료로 쓰인 소재가치가 등가(等價)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주조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주조권한을 가진 왕과 봉건영주들은 비용을 줄여 큰 이익을 얻게됩니다.
금화를 만들때, 처음과는 달리 금(gold)의 함량을 줄이고, 다른 금속(철,은 등)을 섞어서 주조를 하게 됩니다.
즉, 주조이익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세뇨리지(seigniorage) 라고 합니다.

실제 로마시대에 사용되던 은화에는 은의 함유량이 고작 2%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주조화폐는 시간이 흐르면서 명목가치에 비해 소재가치(금. 은 함유량)가 계속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이 반복되면 시장에는 100% 금(gold)이 함유된 금화보다는 50%, 30%, 10% ...5% 처럼
금(gold) 함유량이 적은 화폐만 유통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16세기 영국의 재무관 그레샴(Gresham)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다시말해, 시중에는 금(gold) 함유량이 매우 적은(5%, 10% 등) 정직하지 못한 금화(악화)가
100% 금(gold)이 함유된 순수한(정직한) 금화(양화)를 (시장에서)쫓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는 국가의 법령에 의해 화폐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지폐의 재료를 살펴보면 대부분은 "노일(noil)" 이라는 무명이나 양털 등의
길이가 짧은 섬유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여기에 약간의 펄프와 혼합되고 화학처리가 됩니다.)
한마디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폐는 명목가치에 비해 소재가치는 거의 없는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단지 법에 의해 “너는 돈이다!” 라고 지불 능력이 부여된 "법화(法貨)"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렇게 지폐가 소재가치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유통되고 있지만, 19세기만 해도
소재가치가 없던 지폐라 할지라도 한동안은 화폐의 기본단위, 즉 본위(本位)를 금(gold)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지 지폐와 일정량의(약속된 비율) 금을 교환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태환권(태환지폐) 이라고 하는데, 쉽게 얘기하면 철수라는 사람이 금(gold) 한덩어리를
은행의 금고에 보관합니다. 그러면 은행은 다음과 같은 증서를 철수에게 써줍니다.

"철수가 은행에 금 한덩어리를 맡겼다! 그래서 우리는 철수가 이 보관증을 가져오면 다시 금을 내어 줄 것이다!"

여기서 보관증은 지폐가 되는 것이고, 본위(本位)는 금(gold)한덩어리가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금본위제하에서 지폐(보관증)는 언제든지 금과 교환(태환)할수 있는 것입니다.
(현행 우리나라와 같은 관리통화제의 지폐는 태환할수 없는 불태환 지폐, 즉 불환지폐라 부릅니다.)

더불어 지폐(보관증)를 많이 유통시키려면(통화증가), 그 만큼 금(gold)의 양도 많이 늘어나야 합니다.
결국 금본위제에서 시중의 유동성(통화량)은 본위인 금(gold)의 양에 구속되어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만히 보면 "지폐(보관증)"는 그 자체의 소재(재료)로서는 가치가 거의 없지만,
언제든지 금으로 교환가능하기 때문에, 초창기 100% 금으로 만든 주조화폐의 성격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금(gold)이 늘어나야 시중의 통화량도 함께 늘어나는 금본위제같은 구속본위제와는 달리
현행 우리나라의 관리통화제도인 자유본위제하에서는 정부와 중앙은행이 마음만 먹는다면
돈을 시중에 마음대로 공급할수도 있습니다.(단순가정임!) ... 아무튼 시중의 통화량이 인위적인
요인에 의해 좌우될수 있는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발권과 통화공급 등에 있어서는
많은 절차와 제약이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역시 자유본위제도에서는 돈은 늘어날수밖에 없습니다.
물리적인 금(gold)의 양에 의해 돈을 공급하는 구조보다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합의하에 도출된 계획으로
돈을 공급하는 구조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늘어나면 역시 문제는 인플레이션(inflation)입니다. 즉! 물가가 상승한다는 것인데 ...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는 말은 오래전 남미의 소장사들 사이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소를 팔러가는 상인이 소금으로 절인 마른풀을 미리 소에게 잔뜩 먹여서 시장으로 가는 도중에 물을 먹게하여,
소를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한 것을 인플레이션 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인플레이션(inflation)이 통화량과 관련되어 등장한 것은 미국의 남북전쟁때 였습니다. 미국 정부가
전비조달을 위해 그린백(Green Backs) 이라는 불환지폐를 남발하게 되자, 그 상태가 마치
자루에 공기를 넣어 부풀린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인플레이션 이라고 하였답니다. 그후 본격적으로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입니다.

전쟁으로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에서는 엄청난 불환지폐를 발행하였는데, 그 결과
상상을 초월하는 물가상승이 발생하게 됩니다 ... 특히 독일은 한달에 최고 3만%에 가까운
물가상승(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는데 ... 1923년 11월 당시 빵 1kg에 5200억 마르크,
육류 1kg에 4000억 마르크 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민심은 분노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치스(Nazis)가 탄생했는데,
이때 히틀러(Adolf Hitler)를 "인플레이션의 양자(養子)" 라고까지 부르게 됩니다. 더불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많은 나라들이 1차 세계대전의 전쟁비용 때문에 엄청난 돈을 발행했는데,
전쟁이 끝나자 독일의 화폐가치는 전쟁전에 비해 1조분의1로 폭락했고, 러시아는 500억분의 1,
폴란드는 180만분의 1로 폭락하였습니다.

독일처럼 물가상승의 강도가 감내할 수준을 벗어나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 수준에 도달한다면
실물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이처럼 전쟁에 의한 전쟁인플레이션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이때 정부가 생각할수 있는 정책수단중에 하나가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 이라는 통화개혁입니다.
물론 재정 및 금융정책으로도 통화량을 조절할수 있지만, 디노미네이션은 통화 그 자체에 손을 댄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릅니다.
즉, 돈의 실질가치(사용)는 변하지 않지만 시중에 통용되는 돈의 단위만 바뀌는 것입니다.(통용가치절하)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은 원래 1,000원, 5,000원, 1만원권 등 화폐의 액면금액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화폐단위가 변경되는 의미를 영어로 표현 하려면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또는 "디노미네이션의 변경"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좀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 즉,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은
화폐 가치에 대한 변동 없이 화폐 "액면단위"를 낮추는 것을 가리키는데,
과거에는 "화폐개혁"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습니다.

이 경우 절하 전의 화폐단위의 호칭과 절하 후의 화폐단위의 호칭을 구별하지 않으면 혼동되기 때문에
대개는 화폐 호칭도 함께 변경합니다. 우리나라는 1953년 2월 화폐단위를 100분의 1로 낮추면서
화폐 호칭을 "원"에서 "환"으로 변경했고, 1962년 6월에도 화폐단위를 10분의 1로 낮추면서
호칭을 "환"에서 다시 "원"으로 변경한 경험이 있습니다.

독일의 사례처럼 빵1kg 사러가는데 5,200억 마르크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돈을 트럭으로 싣고 가야합니다.
이런 상황을 다른 나라들이 지켜본다면 너무나 후진국 스럽다고 비웃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으로 단위를 "1,000억대 1"의 비율로 바꾼다면
이제는 빵 1kg를 사러가는데 5.2 마르크를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서면 될것입니다.
실제로 짐바브웨에서는 2008년 7월에 100억 짐바브웨 달러를 1짐바브웨 달러로 변경하기도 했었습니다.

이처럼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은 먼저 대외적으로는 자국 통화의 자존심(위상)을 높여줍니다.
▶ [1달러($)=1,000원] 보다는 [1달러($)=1원]이 좀 더 대등한 관계처럼 보입니다.

또한 거래시의 편의와 돈 뒤에 붙는 "0"의 개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부분에서도
효율성이 제고됩니다. 더불어 화폐 단위의 명칭까지 변경된다면, 불법적으로 조성된 지하자금도
밖으로 나올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돈의 명칭이 '원'에서 '환'으로 바뀐다면
기업들의 비자금이나 불법 사채, 도박장 등 꼭꼭 숨어있던 검은 돈들은 어쩔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원화(구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환화(신권)로 변경되면, 구권인 원화는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중에라도 환화(신권)로 은행에서 바꿀수는 있겠지만, 자금출처나 각종 세금에 대해서는 단단한 각오를 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전국의 모든 ATM기기와 금융기관의 모든 전산시스템을 변경해야 하고, 새로운 화폐제조에 대한 비용과
낮아진 화폐 단위로(▶ 화폐가치가 하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 단위만 일정 비율로 줄어든 것입니다.) 인한
물가상승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 다시말해, 현재 우리나라의 화폐단위를 "100대 1"의 비율로 변경한다면
1만원이 100원으로 바뀌게 되는데 ... 그렇다면 9,900원 피자는 99원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격이 99원이 아닌 100원으로 1원 올라 재설정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이것을 흔히 "우수리 절상효과" 라고 함)
따라서 리디노미네이션은 물가를 상승시키는 영향이 있습니다.

"신혼부부를 위한 전망좋은 아파트 ! ~ 500만원!" ... 어떻습니까?
실물자산이 상당히 싸보이지 않습니까? (▶ 사실 이 부분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 << 한국의 통화개혁 역사 >> ◆

한국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53년 2월과(1차 통화개혁),
1962년 6월(2차 통화개혁)의 2차례 화폐에 대한 개혁이 있었습니다.
이들 1.2차 통화개혁은 인플레이션 대책으로 단행된 통화개혁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목적과 화폐단위절하율, 예금봉쇄율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먼저 1차 통화개혁(1953년 2월) 때에는 신권과 구권의 통용가치절하율이 100대 1 이었습니다. 즉,
100원을 1환으로 변경하였으며, 2차 통화개혁(1962년 6월)에서는 10환을 1원으로 변경하였습니다.


[ @ 1차 통화개혁 - 1953년 2월, 신구화폐 환가비율 100대 1 ]

당시의 상황은 한국전쟁으로 전국 대부분의 공장 등은 문을 닫아 생산활동이 정지가 된 상태였고,
전쟁 때문에 거액의 군사비가 지출되어 통화증발이 지속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통화증발은 돈이 계속 늘어난다는...즉, 돈의 발행을 계속 증가 시킨다는 뜻입니다) ... 따라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증폭되고 있었고, 그러던 중에 1953년 휴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UN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UN군 자체의 운영자금과 UN군 참전군인 개개인들의 사용자금을
우리나라 돈으로 빌려주게 됩니다. 그들도 우리나라 영토내에서 최소한 먹을거리나 술한잔 이라도 하려면
우리의 원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더불어 UN사령부를 운영하는데 심부름꾼 하나라도 한국사람을 쓰게 된다면
급여를 원화로 지급해줘야 합니다.

아무튼 1950년 7월 26일 UN군 사령부는 한국정부와 [주한 UN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1955년 8월까지 한국정부로부터 누계 약 2억 7000만달러($)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통화를 빌려쓰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빌려쓴 돈의 총액중 1할(10%)은 한국측이 부담하기로 하였으며, 잔액은 전부 당시의 공정환율로
1951년에서 1955년에 걸쳐 상환받았습니다. 이렇듯 당시의 한국은 UN군에 대한 대여금과 그에 대한 상환, 그리고
소위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부흥계획과 미국의 경제원조 전망이 호전되면서
정부와 한국은행은 과잉 구매력을 흡수하고 재정·금융 및 산업활동을 안정통화의 토대 위에 올려 놓는 한편,
채납국세 및 연체대출금의 회수도 아울러 도모한 긴급통화·금융조치를 단행하게 됩니다. 다시말해
상당한 수준의 통화증발(돈이 늘어남)로 인한 인플레압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1953년 2월 15일을 기하여
모든 원화 통화의 유통을 금지하고 화폐단위를 100분의 1로 줄여서 새로운 화폐인 '환(圜)화'를 발행하는 한편,
2월 25일 까지 자연인과 법인이 소지한 원화와 원화표시 지불지시를 금융기관에 맡기게 하고,
2월 14일 전의 금융기관에 대한 일체의 채권·채무도 동시에 신고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생활비에 한해서 1인당 5만원까지 예전돈 100원(구권)을 신권 1환으로 교환하게 하고,
그 밖의 일체의 예금에 대해서는 지불을 금지하였습니다. 즉! 돈을 500환까지는 생활비로 교환가능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찾지 못하게 예금을 봉쇄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러한 예금봉쇄 조치는
27일 국회에서 다시 수정을 본뒤 공포.시행 됩니다. ... 간단하게 정리하면
예금중 일정한 체감률을 정해서 자유계정으로 분류합니다. 이렇게 자유계정으로 분류된 예금의 돈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찾아쓸수 있었고, 나머지 자유계정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중에서
4분의1은 "3년특별국채저금계정"으로, 4분의 3은 "2년특별정기예금" 으로 분류되어 봉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금융조치로 인하여 체납국세와 연체대출 상환금 및 봉쇄예금등의 규모가
약 22억환으로서 원래 목표였던 30억환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다시말해
당시의 정부는 30억환 정도를 꽁꽁 묶어두어 시중에 유통되지 못하게 하려했는데, 22억환 밖에 묶어두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원인은 국회에서 정부의 당초 봉쇄율을 수정.완화 하였기 때문입니다. ... 이같은 1차 통화개혁은
당초의 인플레이션 압력과 경제기조를 안정시키는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 2차 통화개혁 - 1962년 6월, 신구화폐 환가비율 10대 1 ]

5.16 쿠데타 후, 박정희 정부는 1년동안 전례없는 돈을 추가공급하게 되는데,
이렇게 통화량이 누적되고, 이것이 구매력과잉과 투기성자금으로 흘러들어갈 가능성도 있게되자,
여기에 과거 정권에서 축적된 검은돈들도 상당할 것이라는 판단과 맞물리면서,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묶어서 봉쇄한 다음
이 돈을 장기산업투자자금으로 활용하려는 생각과 함께 인플레이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려는 생각으로
두 번째의 긴급통화.금융조치를 시행하게 됩니다.

먼저 1962년 6월 10일을 기하여 모든 "환" 통화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화폐단위를 10분 1로 줄여서
새로운 화폐인 "원"화를 발행하게 됩니다. 또한 이 기간중에 생활비와 의료비 및 장례비 등에 한해서
생활비는 1인당 5,000환까지, 의료비는 실비, 장례비는 5만 환까지, 구권 10환 대신 1원으로 교환하고
그 밖에는 일체의 환화예금에 대하여 지불을 동결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거래 및 환화표시 금전채무는
10:1 의 비율로 절하되어 그 단위가 환으로부터 원으로 개칭되게 되었습니다.
다만 액면 50환 이하의 소액권 및 주화는 당분간 액면가치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원표시의 은행권 또는 주화로 신권과
병행 운용하도록 하였으며, 또 6월 15일 법의 일부 개정에 따라 10만 환 이하의 구권 및 재래예금은
전액 환가비율에 의하여 신권으로 지불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2차 통화개혁은 구권과 재래예금의 구별없이 봉쇄계정으로 전환되는 순간
돈을 영구히 찾지못하게 하었습니다.(영구동결) 물론 자유계정으로 분류된 계정도 존재하기 했었지만,
그래도 1차때는 봉쇄계정 이라고 하더라도 3년(3년특별국채저금계정), 2년(2년특별정기예금) 등의 기한이 존재했었지만,
2차 개혁때는 한번 봉쇄계정으로 지정되면 돈은 영구히 찾지 못하는 상황 이었습니다.
다만 2차통화개혁이 실시되었던 그해, 1962년에 설립 예정이었던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전환만 허용 되었습니다.
즉! 봉쇄계정의 돈은 찾을수가 없었지만,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전환은 허락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2차개혁의 예금봉쇄 규정은 봉쇄율의 균형과 금융기관의 공신력을 크게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6월 30일 법의 조항을 개정하기 시작하면서 그 후 7월 13일 "긴급금융조치법에의한 봉쇄예금에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되면서
사실상 봉쇄예금에 대한 동결은 전면적으로 해제가 됩니다. 다시말해 이것은
부동자금을 장기산업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정부가 이와같은 판단을 하게된 것은 과거정권의 검은돈과 부동자금 또는 기대성자금 등이
정부의 예상보다 한참이나 떨어졌기 때문인데 ... 사실 2차 통화개혁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장기산업자금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시행에 있어서
그 타당성이 상당히 빈약했다고 평가할수 있습니다. 결국은 실패로 끝난 2차 통화 개혁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으며, 유통과정을 경색하게 만들었고, 기업과 국민경제에 혼란만 가중시켰습니다.
더불어 통화가치에 대한 불신과 심리적 영향으로 물가의 자극요인도 있었습니다.

끝으로 통화개혁의 범주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족하지만 ....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되자마자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때에 한국은행이 금고에 보관중이던
'조선은행권'이 북한에 의해 탈취되면서 남한 경제가 한때 상당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상황이 이쯤되자 한국은행은 긴급히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한국은행권'을 새로 제조하여
1950년 7월 22일에 최초의 '원(圓)'표시 '한국은행권'을 사용하면서 시중에 떠도는 북한이 탈취한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해주면서 경제를 안정시키게 됩니다.
(일부에서는 이때를 한국최초의 통화개혁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화폐 단위가 축소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1원, 10원, 100원 ... 등의 화폐 단위(동전 단위) 사용이 줄어들면서 앞서 언급했던 우수리 절상효과(물가상승)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 현재 국내 경제가 디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이번 한국은행의 동전없는 사회로의 방향설정이 일부에서는 지지를 받고 있는것 같습니다.

핀테크와 모바일 결제, 전자상품권 처럼 화폐의 디지털화가 실물화폐의 자리를 넘보는
과도기적 시기임은 분명해보입니다 ... 하지만 급격한 변화는 항상 보이지 않는 불안을 내포합니다.

인간이 발명한 라디오는 ... "라디오" 그 자체로서는 가치중립적이었지만
그것을 나치당이 사용했을땐 위험한 "선전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디지털화폐는 인류의 기술진화의 과정중에 탄생한 매우 훌륭한 가치중립적 도구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가치중립적 도구가 (곧 다가올)미래사회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질 것인가를
생생하게 목도하게 될것입니다 ...

우리가 보통 기독교 성가 하면 당장 떠올리는 게 오간의 멜로디를 배경으로 해서 소프라노와 테너 그리고 베이스가 합창하는 모습입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멜로디이죠. 오간 연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여성과 남성의 합창은 거의 반드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러한 형태의 음악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것입니다. 

 

사실 중세의 성가는 무반주로 오직 남성의 목소리에 의존했었습니다.

 

이를 두고 <그레고리안 성가>라고 하죠. 

 

<그레고리안 성가>의 특징은 남성 수도승들이 장엄한 목소리로 신을 찬미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에서 여성은 불완전한 존재였기 때문에 찬송가를 부를 수 없었고, 그리고 악기를 이용한 반주 음악은 불결한 것이었기 때문에 찬송가를 장식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이슬람교와 굉장히 유사하죠. 

 

백문이 불여일견

 

한 번 들어보도록 하죠.

 

 

중세내내 이것이 스탠다드였지만, 15세기에 들어서 엄청난 파격을 선보인 이가 있었습니다.

 

Josquin Des prez라는 인물입니다.

 

 

프랑스 출신인 그는 이탈리아에서 음악을 배웠고, 당시 번지고 있었던 인문주의 사상에 매료되, 다양한 파격적인 기법을 선보입니다.

 

먼저, 음악에 여성을 참여시켰습니다.

 

이는 남성이 독점하고 있었던 음악계에 큰 충격을안겨다주었습니다. 리고 더욱 충격적이게도 당시 민간에서 사용하고 있었던 악기를 미사 연주에 사용했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단성(하나의 목소리)의 음악은 곧 다성(여러 목소리 - 엘토, 소프라노, 베이스 등)음악으로 발전했고, 2성, 3성을 넘어 심지어 6성까지 확대하기도 했습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당시 가톨릭 교회의 교황은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고, 오히려 지원을 하는 성향의 인물이었고, 이에 Josquin Des Prez는 교황합창단의 일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가 작곡한 곡을 한 번 들어볼까요?

 

<아베 마리아>

 

Josquin Des Prez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후학들이 없었다면 이러한 트렌드는 이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교황청의 보수적인 성직자들은 다성음악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고, 끊임없이 다성음악을 금지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임자의 명성을 훨씬 뛰어넘는 괴수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Giovanni da Palestr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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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태생인 그는 일찍이 음악에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고향인 팔레스트리나의 주교는 그를 로마에 적극적으로 추천했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그는 수많은 미사곡을 작곡했고, 결국 교황의 눈에도 띄게 되어 성베드로성당의 공식 음악가로 뽑혔습니다.

 

그는 Josquin Des Prez에 이어 더 파격적인 다성음악을 선보였습니다.

 

단조로운 멜로디를 뛰어넘어 다양한 기교를 도입했고, 그리고 악기도 전례없는 수준으로 사용했습니다.

 

일부 주교들은 그를 신성모독으로 비난했었지만, 당시 교황은 아무래도 그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왕성한 활동을 했고, 수많은 미사곡을 작곡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수파들의 반발에 못이겨서인지 교황은 그를 성베드로대성당에서 쫓아냈고... 대신 성 라테란 대성당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고! 성 레테란 대성당은 베드로대성당 다음 가는 최고 명성의 교회였습니다. 아무래도 교황은 그를 완전히 내치고 싶어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팔레스트리나의 지휘 아래 수많은 명곡들이 탄생했고, 그가 도입한 다성음악과 현란한 기교는 후대까지 이어져 유럽의 음악이 풍성해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팔레스트리나의 명곡들을 한 번 감상해보시죠.

 

Missarum Liber Primus



일본행 무기 밀매 사건



1667년 일본 나가사키. 한 무리의 남자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주범은 이토 코자에몬, 그 죄목은 조선에 무기를 판 것이었다.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이토 코자에몬의 밀무역 사건이었습니다. 
김문경 교수 ㅣ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 밀고한 사람이 있어서 일본쪽에서 알게 된거죠. 무려 90명이 체포 돼서 극형을 당한 겁니다.

일본에서 발각된 사상 최대의 무기 밀매단 사건. 그들이 무기를 팔아넘긴 곳은 조선, 조선 또한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일본 열도를 뒤흔든 대규모 무기 밀수 사건. 17세기 조선과 일본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곳은 일본의 항구도시 나가사키다. 17세기 이곳 나가사키는 동북아 무역의 중심지이자 일본으로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창구였다.

당시 외국과의 교역은 일본 막부에 의해서 엄격하게 관리 되었는데 1667년 나가사키에서 엄청난 밀수 사건이 발생한다.

대규모 밀수 조직이 당시 수출 금지품목이었던 일본의 무기를 팔아넘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기를 판 곳은 바로 조선이었다.

약 350여년 전 이곳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일본 열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나가사키는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다.

다른 곳에서는 이미 운행이 중단된 백 년이 넘은 전차들이 여전히 도심을 누비고 다닌다.

나가사키에서 무기밀매단이 발각된 것은 1667년, 당시의 사건 기록을 찾아보기로 했다.

17세기,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범죄사건을 기록해놓은 책이 있다. 무기밀수사건의 전말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이 사료는 범과장이다. 
오카모토 켄이치로 연구원 ㅣ 나가사키역사문화박물관 : 이것은 ‘범과장’으로 에도시대 나가사키를 통치하던 나가사키부 봉행소의 재판기록입니다.

나가사키 주변에서 벌어진 밀무역이나 도시에서 일어난 싸움 등을 포함한 다양한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나가사키 봉행이라는 책임자가 판결을

내린 당시의 기록물입니다.

범과장에 처음 등장하는 범죄 기록이라는 이토 코자에만이라는 자가 주도한 무기밀수사건. 
오카모토 켄이치로 연구원 ㅣ 나가사키역사문화박물관 : 에도시대 초기의 가장 큰 사건을 들면 역시 이토 코자에몬 사건으로

이 기록물에 맨 처음 실린 것도 그 사실을 방증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두께도 두꺼워 약 30년간의 기록을 정리한 것 중에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토 코자에만 사건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관련자 숫자나 규모로 볼 때 1667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근세 최대급 밀수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은 모두 100명,

그 중 무려 43명이 사형을 당했다. 주범들의 경우 그 자식들까지 참형을 면치 못했다.

죄인들의 죄목은 조선에 무기류를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주범 이토 코자에몬에 대한 재판기록은 그들이 조선에 무기를 팔아넘긴 시기를 명시하고 있다.

묘진양년, 이는 1663년과 1664년에 해당한다. 
그 시기 밀수사건과 관련해 조선측 자료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 밀수를 뜻하는 잠상, 밀매, 잠매 등의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1660년대 중반 정상적인 무역이 아닌 비합법적인 상단으로부터 무기류를 구입했다는 기사는 모두 6건이었다. 
이토 코자에몬이 무기 밀매에 나섰던 1663년, 우리측 기록은 화약의 재료인 유황을 실은 일본선이 가덕진에 나타났다고 전한다. 
작년 가을(1663년) 왜인들이 유황 1만 3천 6백여 석을 싣고 어둠을 틈타 가덕도에 정박하였다
- 비변사등록 현종5년(1664) -

일본의 밀수선이 들어왔다는 가덕도. 당시 가덕도는 일본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진입하는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이런 이유로 가덕도는 늘 왜구의 침입에 시달렸고 임진왜란 발발의 첫 봉화를 올린 것도 가덕도였다. 지금은 흔적만 겨우 남은 성벽은

이곳이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전진기지였음을 말해준다. 
전재문 이사 ㅣ 부산강서문화원 : 이곳은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나 군사적으로 최고 요충지이고 최전방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휴전선 최전방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늘 가덕도는 왜적들의 침입에 시달려온 장소입니다.

조선 말까지 군사가 주둔했던 가덕도. 섬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연대봉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남아있다.

봉수대에서는 남해섬들과 부산 그리고 일본 대마도까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부산항 입구에 위치하면서 대마도를 마주보고 있는 가덕도. 가덕도는 이러한 지형적 특징으로 일본 밀수 선박의 주요통로가 되었다. 
전재문 이사 ㅣ 부산강서문화원 : 부산포와 대마도 사이에 선박 접안이 용이한 곳이 가덕도입니다. 
가덕도 뿐 아니라 남해안의 가까운 섬들은 일본 밀매단에게 좋은 은신처이자 접선지가 되었다.

1665년에는 일본인들이 탄 배가 몰래 용초도로 들어왔다. 
왜인들이 탄 배 한 척이 몰래 용초도에 정박하다
- 현종개수실록 6년(1665) -

거제도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 용초도. 적막을 깨우는 사건이 일어난다. 수상한 선박의 출현은 곧 관청에 보고됐다.

확인된 결과, 배에 탙 이들은 일본의 상인이었다. 이들이 가득 싣고 온 물건은 바로 일본의 무기들.

배에는 다양한 일본제 무기들과 전쟁물자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화약의 재료인 석유황, 활을 만드는 필수적인 흑각, 그리고 조총과 장검 등이었다.

그런데 용초도에 정박한 일본 상인들은 누군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들이 찾는 사람은 임주부와 피봉사였다. 
김동철 교수 ㅣ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 : 주부와 봉사는 당시 조선의 하층관직 이름입니다.

실제 이 사람들이 이 이름을 썼다기보다는 아마 요즘 주사라든지 사장님이라고 부르듯이 관용적으로 쓰이는 호칭입니다. 
연락을 받은 임주부와 피봉사는 일본 밀수섬으로 향했다. 이들은 익숙하게 일본인들과 거래를 했다. 일본밀수선과의 거래가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 밀수단의 조선측 파트너는 피기문, 임지죽이란 이름의 상인들이었다. 1660년대 중반, 남해안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일본제 무기류 밀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 남겨진 사료와 정황을 종합해보면 일본의 1660년대 밀무역조직은 조선까지 불법적으로 투항해 와 대량의 일본제 무기를 팔아넘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일본인들도 직접적으로 이름을 거론할 정도로 조선에서 밀무역품을 지속적으로 사들인 자들이 있었다는 것인데 당시 유황과 같은 무기류들은 일반상인이 다루기에 제약이 따랐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무기 밀매에 손을 댄 것일까?
밀수가 아닌 정상적인 일본과의 무역은 왜관에서 이루어졌다. 무기밀수사건이 일어난 1660년대에 일본과의 교역이 이루어진 곳은 두모포 왜관. 당시 두모포 왜관은 부산 동부, 지금의 수정시장 자리에 위치해있었는데 나중에 왜관이 초량으로 옮겨가면서 이 일대는 구관으로 불렸다.

현재는 길 이름으로만 남아있지만 두모포 왜관이 있던 당시 이 일대는 모두 바다였다. 두모포 왜관은 부산진성 동쪽으로 바다를 낀 위치에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교역을 재개하면서 문을 열었던 왜관이 절영도에서 두모포로 옮겨가 있던 시점이었다.

김동철 교수 ㅣ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 : 조선과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에 무역을 시작하게 된 것은 1601년부터 부산 영도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부터였으므로 거의 20년 동안은 왜관에서 공식적으로 무역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고 1601년~1607년까지는 영도입니다만 1607년~16078년까지는

지금 부산 동구청에 있었던 두모포 왜관이라는 곳에서 이뤄졌습니다.

두모포 왜관의 대청이라고 하는 곳에서 무기의 거래가 공식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왜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두모포 왜관은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초량왜관을 그린 그림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왜관에는 무역선이 드나들 수 있는 선창과 실제 거래가 이루어지던 개시대청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왜관에서는 일본인과의 무역거래가 5일장으로 열렸다. 이때 허가받은 상인들만 왜관에 들어가 물건을 사고팔 수 있었다.

왜관에서의 무역거래는 철저한 관리와 감시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왜관 안에서도 밀수사건은 가끔 일어났고 조정의 처벌은 엄격했다. 
동래에서 밀무역한 상인 임소의 목을 베고 효시하다
- 인조실록 1년(1623) -

그런데 왜관 밖에서 일어난 이번 밀수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달랐다. 무기밀수를 둘러싸고 조정 내 의견이 분분했다. 
호조판서 정치화
밀무역은 저들 나라가 엄중히 금하는 것입니다.
어찌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키지 않겠습니까?
- 현종실록 6년(1665) -
반면 좌의정 원두표은 달랐다. 
좌의정 원두표
유황 1백 근 값이 은화 70냥에 불과하고 앞으로 더 내릴 것이므로 이 길을 끊어서는 안 됩니다
- 현종실록 5년(1664) -

무기밀수를 두고 조정이 혼란스럽던 그 시기, 왕명으로 설치된 군사조직 훈련도감에서는 새로운 계획이 도모되고 있었다.

훈련도감 대장 이완이 직접 상인에게 지시해 유황을 구할 길을 찾으라 지시한 것이다. 밀수를 지시한 것이다. 
훈련도감 대장 이완이 서울 사람 이응상에게 분부하여 사람을 동래에 보내 유황이 생길 수 있는 길을 도모하도록 하였다
- 비변사등록 현종5년(1664) - 
김문경 교수 ㅣ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 훈련대장 이완과 좌의정 원두표는 소위 북벌정책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정책을 수행한 책임자들입니다.

이 두 사람이 직접 지시를 내려서 그러니까 국왕도 그때 알고 있었던 거죠. 이 사실을.

적이 번번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은 오로지 화포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나라의 약점은 바로 화포를 사용하지 못하는데 있다 - 선조실록 26년(1593) -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신무기에 대한 중요성을 절감했다. 임진왜란 초기, 전세를 제압한 것은 일본군의 우수한 조총이었다.

삼수병 체제 : 포수(조총), 살수(검), 사수(활)로 이루어진 보병체제
이후 병자호란에서도 크게 패하며 치욕을 당한 조선에선 하나의 이념이 싹텄다.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다. 이를 위해 군을 강화했다.

훈련도감을 포수, 살수, 사수로 이루어진 삼수병 체제로 개편하는 한편 총기를 개량하고 조총병 양성에 힘을 쏟았다. 
박재광 학예연구관 ㅣ 전쟁기념관 : 17~18세기가 되면 조총이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그런 형태로 발전하게 되죠.

반면 삼수병 중에서 사수(활)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비중이 점점 떨어지죠.

기병위주의 편제와 전술체계를 가졌던 조선군이 전쟁 이후 급속히 조총보병 위주로 체제를 바꾼 것이다.

이러한 조선군 전술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자료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8년, 장양공 이일이 여진족 마을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 전투상황이 잘 표현된 이 그림에서 조선군은 기병이 주력이다. 기병을 중심으로 여진족 마을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다.

무기도 기병의 주무기인 월도와 활을 든 병사들이 주로 보인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 장양공 이일이 함경도 지역을 침략하던 여진족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로부터 30년 후에 또다른 기록에서는 변화한 조선군의 양상이 잘 드러난다.

1619년, 명을 도와 후금을 치기 위해 나선 조선군은 심양 부근에서 후금군과 맞서게 된다. 이때 장면을 그린 그림이 파진대적도다.

이 그림에 보이는 조선군은 조총병을 전면에 포진한 보병부대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군은 그 체제와 전술을 급격히 조총 보병 위주로 재편한 것이다.
충렬록 : 조선의 무신 김응하의 전승을 기리는 문집
파진대적도 : 1619년 김응하가 지휘하는 조선 원정군이 후금군과 맞선 장면을 그린 그림
박재광 학예연구관 ㅣ 전쟁기념관 : 조총병의 전술적인 비중이 핵심병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물론 심하전투에 나갔을 대 조선군 병력편성을 보면 포수도, 살수도, 사수도 있지만 핵심적으로 기능하는 병력이 결국 포수였다는 것을 그림에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석유황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데...
저축된 것이 없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 비변사등록 현종 5년(1664) -
전술변화로 조총의 수가 늘면서 조총에 들어가는 화약의 수요도 증가했다. 그런데 화약의 핵심재료인 유황은 조선에서는 나지 않아 귀했다.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 ㅣ 릿쿄대학교 사학과 : 이 시기 마침 조선은 총을 중심으로 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 병제개혁에 나선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총에 넣기 위한 화약이 필요했죠. 그보다 몇 년 전에는 도쿠가와 막부도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 다량의 유황을 조선에 수출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총, 화약, 그리고 화약을 만들기 위한 유황을 조선에서 원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황의 최대생산지는 일본이었다. 화산지대가 넓게 분포한 일본에는 유황광산이 많았다. 채굴도 쉬워 각지에서 유황이 생산됐다.

아예 유황산이라 이름붙여진 이곳에선 아직도 화산 활동이 활발하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곳곳에는 유황광산이 있었다.

인근 화산지대에 위치한 노천온천. 유황성분이 포함된 수증기가 쉴새없이 뿜어져 나온다. 돌에 노랗게 침착된 성분이 바로 유황이다.

순도가 높은 유황석의 경우는 돌 전체가 노란색을 띤다. 17세기 일본의 밀매단이 조선으로 팔아넘긴 무기류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 것이 유황이었다.

신전자초방에 따른 화약재료 혼합비율 - 유회 7 : 유황 15 : 염초 78
화약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버드나무 숯인 유해와 염초, 유황 세가지 원료가 필요하다.

이를 이용해 17세기 사용했던 흑색화약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화약제조법을 밝힌 당시의 병서 신전자초방에 근거해 유회, 유황, 염초를 7:15:78로 배합했다.

민병만 ㅣ 한화기념관장 : 염초와 숯, 유황 세 가지를 섞어서 만들었던 흑색화약의 일종인데 그중에 유황은 흑색화약의 환원제, 연료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산화제로 쓰이는 염초와 비율이 적절하게 맞아야 되는데 유황이 덜 들어가면 화약의 위력이 현격히 떨어지고 차이가 납니다.

실제 화약의 위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정상비율의 화약과 유황을 절반만 넣은 화약을 준비했다.

두가지 화약에 불을 붙여 폭발력을 비교해보는 실험이다. 화약을 점화시키자 둘다 강한 불꽃을 내며 타올랐다.

타는 속도와 자국은 차이가 컸다.

유황이 적게 들어간 화약은 타는 속도가 느렸다. 폭발력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유황은 화약의 위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원료인 것이다. 따라서 유황부족은 전력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이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김동철 교수 ㅣ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장 : 유황이나 염초의 경우에는 외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로 염초는 중국에서 많이 생산됐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서 많이 수입되고 유황은 일본이 화산의 나라이기 때문에

주로 일본을 통해서 많이 수입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무기류를 다른 나라에 팔아 넘겨서는 안된다
- 1621년의 무기금수조치 봉서 -
북벌의 기치 아래 군사력을 강화하던 그 시기, 유황확보에 제동이 걸린 사건이 발생한다.

1621년, 일본에서 무기나 군수물자는 더이상 외국에 팔아넘겨서는 안된다는 이른바 무기금수조치가 내려졌다.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조선에서도 일본의 무기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1620년대 초에 막부가 일본제 무기류의 수출 금지령을 발표함으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무기류를 구입하기가 힘들어지는 상황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1667년,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대규모 처형사건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조선의 수요는 많은데 정상적인 수출의 길이 끊기자 일본 내에서 밀매조직이 생겨난 것이다.

무역항인 나가사키의 이토 코자에몬을 중심으로 오사카, 대마도 등 광범한 지역에 달하는 거대한 밀매조직이 형성됐다.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 ㅣ 릿쿄대학교 사학과 :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규슈 사람들은 나가사키와 무역 등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죠.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한 무역 네트워크가 구축되어 있었다는 거죠. 상품 유통은 인간의 왕래, 인간의 교류와도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가사키, 하카타를 중심으로 규슈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출신자들이 연루된 겁니다.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일본에서 막부가 일본제 무기류의 수출을 금지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서 수입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졌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결국 비공식적 통로로 유황을 구입할 수밖에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조선 정부 측에서 비공식적 통로를 통한 유황구입을 지시하게 되지요.

17세기 무기밀수는 일본 무기류를 필요로 하는 조선정부로부터 시작됐다.

무기류 구입 의사가 상인이나 역관을 통해 일본측에 전달되면 일본의 밀매조직이 물건을 확보해 조선에 넘긴 것이다. 
김근행은 자급을 더해주고, 김덕생은 면천해주며 임지죽 등은 모두 통정첩을 주라
- 비변사등록 현종 6년(1665) -
은밀하게 진행된 일련의 무기밀수과정. 조선의 왕은 어디까지 관여하고 있었을까? 실록에는 밀수관련자들에 관한 포상기록이 전한다.

훈련도감에 무기밀수 지시의 배경에는 임금이 있었다. 북벌의 꿈을 키우던 17세기 조선, 부족한 무기와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임금과 조정이 같이 나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무기밀수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1660년대 조선조정은 일본의 무기류와 유황을 밀수를 통해서라도 구입하고자 했다.

이에 일본에서는 대규모 밀매조직이 형성됐고 이들은 무기류를 실어와 조선에 팔아 넘긴다.

이러한 일련의 밀매는 1667년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무기밀매조직이 적발되면서 막을 내린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토 코자에몬이라는 지금의 재벌에 해당하는 거상이 개입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일본 사회에 커다란 파장이 일게 된다.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묘락사. 이 절은 무기밀매사건의 주모자로 처형된 이토 코자에몬의 가문과 인연이 깊다. 
이 그림이 처형된 2대 코자에몬의 초상화입니다.
2대 코자에몬은 처형당한 탓에 초상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대 코자에몬의 얼굴을 근거로 그린 것입니다.

초상화를 그려 고이 모셔둘 만큼 이 절에서는 이토 코자에몬의 예우가 각별했다.

이토 코자에몬의 부모는 이 절에 많은 재산을 시주하고 대대로 묘와 위패를 모시는 가문의 사찰로 삼았다.

와타나베 키오도오 주지 ㅣ 묘락사 : 이 묘의 주인은 처형당한 이토 코자에몬입니다. 이토 코자에몬은 나가사키에서 처형당했는데요.

이곳 묘락사의 주지스님인 잇보화상이 코자에몬의 시체를 인수하여 그의 아버지 묘 옆에 매장했습니다.

이토 코자에몬은 이곳 후쿠오카의 상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상인이었습니다.

그래서 3대 번주인 구로다 미쓰유키는 그에 대한 신망이 두터웠고 후쿠오카의 재정을 뒷받침했습니다.

즉 밀무역을 통해 이익을 올려 이곳 후쿠오카의 재정을 뒷받침했던 거죠. 그래서 후쿠오카에서 볼 때는 은혜를 많이 입은 상인이었습니다. 
비록 밀수에 손대기는 했지만 무역업을 활발히 했던 이토 코자에몬은 후쿠오카를 국제무역항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1998년에는 후쿠오카 상인들이 이토 코자에몬과 함께 처형당한 그의 아들을 애도하는 비석까지 세웠다.

이토 코자에몬에 관해 평생을 연구한 다케노 요오코 교수.

그녀는 이토 코자에몬이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무역활동을 펼쳤고 이를 통해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주장한다. 
다케노 요오코 명예교수 ㅣ 후쿠오카대학 : 그러니까 거부였습니다. 막부의 예산보다 재산이 많았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였는지 잘 아시겠죠? 일본 막부보다 훨씬 돈이 많았다는 거죠.

당시 일반적으로는 일본의 부자 중 은 1천 관을 가지고 있으면 엄청난 부자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7천 관이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교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었죠. 일본 최고를 넘어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거부였던 셈이죠.

이토 코자에몬의 출신지로 알려진 기타규슈시 고야노세 마을. 과거 이곳은 오사카와 나가사키를 잇는 가장 중요한 역참마을이었다.

800m에 달하는 이 거리는 역참마을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토 코자에몬 집안은 이 마을의 초기 번영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후쿠오카로 다시 나가사키로 진출해 사업을 확장한다.

최근 들어선 고야노세 기념관에는 이토 코자에몬의 전시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토 코자에몬이 후쿠오카를 발전시키고 해양무역업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마츠오 요시미 ㅣ 향토사학자 : 이토 코자에몬의 무역활동은 쌀 뿐만 아니라 철 등 넓은 범위의 물품을 이용해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대마도, 조선 등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배를 이용한 무역업을 했습니다.

이토 코자에몬 49세, 1667년 6월 25일 체포
이 자는 다른 자들과 공모하여 조선국에 무기를 팔았다
11월 그뭄날 책형에 처했다
거상으로 이름 떨치던 이토 코자에몬. 그러나 조선과의 무기밀수가 발각되면서 그의 운명도 끝이 났다.

이토 코자에몬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조선과의 무기밀수에 가담했다가 처형을 당했다. 당시 체포된 사람만 94명.

이중 이토 코자에몬을 비롯한 주동자 5명에게는 하리츠케, 즉 책형이 내려졌다.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 ㅣ 릿쿄대학교 사학과 : 남자는 속옷 한 장만 입히고 십자가에 매달아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늑골 아래로 창을 깊숙이 찔러 죽이는 처형방식이었습니다. 사형 자체가 극형이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책형은 상당히 잔혹했죠.

이렇게 매달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처형됐기 때문에 본보기를 보이는 의미도 담고 있었습니다. 역시 잔혹한 처벌방식이었죠.

책형은 죄인을 십자가형틀에 묶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이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책형은 반역자나 주인을 살해한 노예, 부모를 죽인 패륜에 적용하던 형벌이었다.

밀수를 했다는 죄목으로 책형이 내려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막부는 당시 무기밀수를 일종의 반역행위로 규정한 것이었다.

당시 책형이 행해졌던 곳은 현재 26성인기념관이 들어선 자리다. 바닷가 언덕에 위치한 이곳은 에도막부시대 기독교 신자들의 처형장소로도 쓰였다. 
렌조 루카 ㅣ 26성인기념관장 : 당시 바다를 통해 출입하던 외국 선박들이 볼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좁은 길이 ‘우라카미가도’로 나가사키와 우라카미를 잇는 가도였기 때문에 이곳은 꼭 지나칠 수밖에 없던 길이었죠.

(그래서) 본보기를 보이는 데는 안성맞춤인 곳이었죠.

예를 들어 사형을 당한 시체의 머리만을 내걸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매우 눈에 띄는 장소를 처형지로 선정했던 거죠.

가장 잔혹한 사형방식인 책형. 무기 밀거래를 한 자들에게 책형을 가할 만큼 당시 처벌이 엄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쇄국정책이 확고한 국법으로 정립된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난 후로

막부의 정치가 안정기로 들어간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막부로서도 쇄국령을 어긴 이러한 밀매조직을 아주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특히 일본 막부는 거상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토 코자에몬을 책형에 처하면서 철저한 본보기로 삼고자 한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동아시아 정세를 이용해 막대한 부를 축적해갔던 이토 코자에몬.

조선의 유황과 무기를 몰래 팔았다는 이유로 결국 가혹한 형벌로 삶을 마감했다. 
전에 나가사키에 이토라는 큰 부자가 있었다
밀수는 원래 이 부자가 시작했는데 무기를 조선에 가지고 가서 팔았다
이토 코자에몬이 죽은 후에도 사람들은 이 사건을 자주 거론했다.

최근에는 중국어 교과서에도 그의 이야기가 실려있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당통사심득, 에도막부시대 중국어 통역사 교육을 위한 책으로 쓰였다.

여기도 조선에 무기를 판 이토 코자에몬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김문경 교수 ㅣ 성균관대 동아시아학과 : 이토 사건이, 그 밀수 사건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 때는 나가사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것이 교과서에 나온 이유는 통역들에게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 이토 코자에몬은 굉장히 부자였는데 아무 불편이 없는데

욕심을 부려서 조선과 밀무역을 했다 그것도 한두 번으로 그만두었으면 안 들켰을텐데 열 몇 번 했기 때문에 들켜서 사형을 당했다

그래서 사람은 너무 욕심을 부리면 안된다 그런 취지로 이 교과서에는 게재되어 있습니다.

일본 막부는 조선에 무기를 팔아넘긴 이토 코자에몬 사건을 두고 두고 후세에 경계로 삼고자 했다.

또한 이 사건은 일본인 가담자에 대한 처벌로만 끝나지 않았다.

일본막부는 조선정부에 사건의 진상규명과 조선측 관련자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다.
아라노 야스노리 교수 ㅣ 릿쿄대학교 사학과 : 조선은 끝끝내 그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대신에 차선책을 택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 대신에 이전부터 쓰시마번이 요구해 왔던 왜관의 이전, 즉 두모포에서 좀 더 조건이 좋은 곳으로의 이전을 허가합니다. 그 결과 초량왜관이 설립됩니다.

이의립을 시켜 제련하게 하여 유황을 취했는데 색과 품질이 같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상을 베풀어 장려해야 하겠습니다
- 현종개수실록 4년(1663) -
이토 코자에몬 사건 이후 조선은 더이상 일본을 통해 화약재료인 유황을 구할 수 없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유황광산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만호봉에서 유황을 얻다
- 현종 10년(1669) -
당시 유황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이의립이다. 이의립은 조선의 뛰어난 기술자였다.

무기밀수사건이 일어나던 당시 이의립은 전국의 산을 헤매며 유황광산 개발에 매달렸다.

결국 그는 1669년 경주 만호봉에서 유황광산을 발견했다.

만호봉은 경주 토함산 북서쪽에 있는 높이 500여미터의 봉우리다. 만호봉에 유황광산 흔적이 남아있을까?

정상 가까이 올라가면 경주 주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화산석이 발견된다.

유황성분이 포함된 화산석은 이 일대에서는 오직 만호봉에서만 발견된다.

만호봉 정상부를 뒤덮은 화산석들, 이의립이 유황산을 찾은 것도 이 부근일 것이다.

이의립은 이곳 만호봉에서 유황산을 발견하고 스스로 터득한 자취법을 통해 유황을 추출해냈다. 조선에서도 유황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

그 공을 인정해 현종은 이의립에서 구충당이라는 호를 하사하고 벼슬을 내렸다. 
윤유숙 연구위원 ㅣ 동북아역사재단 : 가장 문제시됐던 유황광산 개발이 17세기 말 이후에 본격화되면서 더 이상 일본으로부터

비공식적 통로를 통해서까지 유황을 구입해야 될 이유가 없어진 것이죠. 
국내에서 유황이 생산되면서 조선의 고민은 해결됐다. 이후 조정이 주도하는 국가차원의 밀수도 더이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황광산의 개발로 유황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조선은 더이상 일본으로부터의 밀수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

밀수를 하지 않더라도 필요한 화약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임금과 조정이 무기와 밀수에 나섰던 희대의 사건.

17세기 최대의 무기 밀수사건은 동아시아 전체를 거대한 전쟁으로 끌고 들어갔던 일본과 두 차례나 한반도를 유린했던 신흥강국 청나라,

두 강국 사이에서 다급하게 자주 국방을 이루고자 했던 약소국 조선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었다.

개드립 - 펌) 17세기 일본을 뒤흔든 조선행 무기 밀매사건 ( http://www.dogdrip.net/93238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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