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는 화폐의 역사
관리통화제는 통화를, 즉! 돈을 정부와 중앙은행(한국은행)이 자유재량으로 조절할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이 어느 특정한 본위(本位)[금gold, 은, 금화 등]와 결부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본위제 라고도 합니다. 다시말해 금(gold)이나, 금화, 은, 금환 등 처럼
특정한 금속의 일정량과 화폐의 일정량이 결부되어진 구속본위제(금본위제)와는 다른 화폐제도인 것입니다.
오래전에는 금속 자체가 화폐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금속 중에서도 주로 금(gold)이 화폐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렇게 금속(gold) 자체가 화폐역할을 했던 것을 금속화폐 라고 합니다.
하지만, 금속화폐는 거래를 할때마다 일일이 모양과 무게를 측정하고 따져야 했기 때문에
많은 불편함이 존재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형태의 화폐를 칭량화폐(秤量貨幣) 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래의 불편을 덜고 화폐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정한 양의 금속과
일정한 모양으로 금속을 주조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주조화폐(鑄造貨幣)입니다.
즉,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500원, 100원 동전처럼 크기와 모양과, 금속의 함유량을 일정하게 하여 화폐를 만든것입니다.
초창기 주조화폐에는 재료로 쓰인 금속의 가치와 화폐의 명목(액면)가치가 같았습니다. 다시말해
주조화폐가 금화(gold) 였다고 가정하고, 금화 액면에 100원 이라고 쓰여있었다면
그 금화를 만들기위해 사용된 금(gold)의 양 자체도 100원어치가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조화폐의 가치와 재료로 쓰인 소재가치가 등가(等價)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주조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주조권한을 가진 왕과 봉건영주들은 비용을 줄여 큰 이익을 얻게됩니다.
금화를 만들때, 처음과는 달리 금(gold)의 함량을 줄이고, 다른 금속(철,은 등)을 섞어서 주조를 하게 됩니다.
즉, 주조이익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것을 세뇨리지(seigniorage) 라고 합니다.
실제 로마시대에 사용되던 은화에는 은의 함유량이 고작 2%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주조화폐는 시간이 흐르면서 명목가치에 비해 소재가치(금. 은 함유량)가 계속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흐름이 반복되면 시장에는 100% 금(gold)이 함유된 금화보다는 50%, 30%, 10% ...5% 처럼
금(gold) 함유량이 적은 화폐만 유통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16세기 영국의 재무관 그레샴(Gresham)은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다시말해, 시중에는 금(gold) 함유량이 매우 적은(5%, 10% 등) 정직하지 못한 금화(악화)가
100% 금(gold)이 함유된 순수한(정직한) 금화(양화)를 (시장에서)쫓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폐는 국가의 법령에 의해 화폐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 지폐의 재료를 살펴보면 대부분은 "노일(noil)" 이라는 무명이나 양털 등의
길이가 짧은 섬유의 한 종류일 뿐입니다.(여기에 약간의 펄프와 혼합되고 화학처리가 됩니다.)
한마디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지폐는 명목가치에 비해 소재가치는 거의 없는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단지 법에 의해 “너는 돈이다!” 라고 지불 능력이 부여된 "법화(法貨)"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렇게 지폐가 소재가치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유통되고 있지만, 19세기만 해도
소재가치가 없던 지폐라 할지라도 한동안은 화폐의 기본단위, 즉 본위(本位)를 금(gold)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요청이 있으면 언제든지 지폐와 일정량의(약속된 비율) 금을 교환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태환권(태환지폐) 이라고 하는데, 쉽게 얘기하면 철수라는 사람이 금(gold) 한덩어리를
은행의 금고에 보관합니다. 그러면 은행은 다음과 같은 증서를 철수에게 써줍니다.
"철수가 은행에 금 한덩어리를 맡겼다! 그래서 우리는 철수가 이 보관증을 가져오면 다시 금을 내어 줄 것이다!"
여기서 보관증은 지폐가 되는 것이고, 본위(本位)는 금(gold)한덩어리가 되는것입니다. 그래서
금본위제하에서 지폐(보관증)는 언제든지 금과 교환(태환)할수 있는 것입니다.
(현행 우리나라와 같은 관리통화제의 지폐는 태환할수 없는 불태환 지폐, 즉 불환지폐라 부릅니다.)
더불어 지폐(보관증)를 많이 유통시키려면(통화증가), 그 만큼 금(gold)의 양도 많이 늘어나야 합니다.
결국 금본위제에서 시중의 유동성(통화량)은 본위인 금(gold)의 양에 구속되어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만히 보면 "지폐(보관증)"는 그 자체의 소재(재료)로서는 가치가 거의 없지만,
언제든지 금으로 교환가능하기 때문에, 초창기 100% 금으로 만든 주조화폐의 성격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금(gold)이 늘어나야 시중의 통화량도 함께 늘어나는 금본위제같은 구속본위제와는 달리
현행 우리나라의 관리통화제도인 자유본위제하에서는 정부와 중앙은행이 마음만 먹는다면
돈을 시중에 마음대로 공급할수도 있습니다.(단순가정임!) ... 아무튼 시중의 통화량이 인위적인
요인에 의해 좌우될수 있는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발권과 통화공급 등에 있어서는
많은 절차와 제약이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역시 자유본위제도에서는 돈은 늘어날수밖에 없습니다.
물리적인 금(gold)의 양에 의해 돈을 공급하는 구조보다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합의하에 도출된 계획으로
돈을 공급하는 구조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늘어나면 역시 문제는 인플레이션(inflation)입니다. 즉! 물가가 상승한다는 것인데 ...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는 말은 오래전 남미의 소장사들 사이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소를 팔러가는 상인이 소금으로 절인 마른풀을 미리 소에게 잔뜩 먹여서 시장으로 가는 도중에 물을 먹게하여,
소를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한 것을 인플레이션 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인플레이션(inflation)이 통화량과 관련되어 등장한 것은 미국의 남북전쟁때 였습니다. 미국 정부가
전비조달을 위해 그린백(Green Backs) 이라는 불환지폐를 남발하게 되자, 그 상태가 마치
자루에 공기를 넣어 부풀린 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인플레이션 이라고 하였답니다. 그후 본격적으로
인플레이션(inflation)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입니다.
전쟁으로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에서는 엄청난 불환지폐를 발행하였는데, 그 결과
상상을 초월하는 물가상승이 발생하게 됩니다 ... 특히 독일은 한달에 최고 3만%에 가까운
물가상승(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는데 ... 1923년 11월 당시 빵 1kg에 5200억 마르크,
육류 1kg에 4000억 마르크 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민심은 분노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치스(Nazis)가 탄생했는데,
이때 히틀러(Adolf Hitler)를 "인플레이션의 양자(養子)" 라고까지 부르게 됩니다. 더불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많은 나라들이 1차 세계대전의 전쟁비용 때문에 엄청난 돈을 발행했는데,
전쟁이 끝나자 독일의 화폐가치는 전쟁전에 비해 1조분의1로 폭락했고, 러시아는 500억분의 1,
폴란드는 180만분의 1로 폭락하였습니다.
독일처럼 물가상승의 강도가 감내할 수준을 벗어나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 inflation) 수준에 도달한다면
실물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이처럼 전쟁에 의한 전쟁인플레이션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이때 정부가 생각할수 있는 정책수단중에 하나가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 이라는 통화개혁입니다.
물론 재정 및 금융정책으로도 통화량을 조절할수 있지만, 디노미네이션은 통화 그 자체에 손을 댄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릅니다.
즉, 돈의 실질가치(사용)는 변하지 않지만 시중에 통용되는 돈의 단위만 바뀌는 것입니다.(통용가치절하)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은 원래 1,000원, 5,000원, 1만원권 등 화폐의 액면금액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국은행은 화폐단위가 변경되는 의미를 영어로 표현 하려면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또는 "디노미네이션의 변경"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좀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 즉,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은
화폐 가치에 대한 변동 없이 화폐 "액면단위"를 낮추는 것을 가리키는데,
과거에는 "화폐개혁"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습니다.
이 경우 절하 전의 화폐단위의 호칭과 절하 후의 화폐단위의 호칭을 구별하지 않으면 혼동되기 때문에
대개는 화폐 호칭도 함께 변경합니다. 우리나라는 1953년 2월 화폐단위를 100분의 1로 낮추면서
화폐 호칭을 "원"에서 "환"으로 변경했고, 1962년 6월에도 화폐단위를 10분의 1로 낮추면서
호칭을 "환"에서 다시 "원"으로 변경한 경험이 있습니다.
독일의 사례처럼 빵1kg 사러가는데 5,200억 마르크가 필요하다고 한다면, 돈을 트럭으로 싣고 가야합니다.
이런 상황을 다른 나라들이 지켜본다면 너무나 후진국 스럽다고 비웃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으로 단위를 "1,000억대 1"의 비율로 바꾼다면
이제는 빵 1kg를 사러가는데 5.2 마르크를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서면 될것입니다.
실제로 짐바브웨에서는 2008년 7월에 100억 짐바브웨 달러를 1짐바브웨 달러로 변경하기도 했었습니다.
이처럼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은 먼저 대외적으로는 자국 통화의 자존심(위상)을 높여줍니다.
▶ [1달러($)=1,000원] 보다는 [1달러($)=1원]이 좀 더 대등한 관계처럼 보입니다.
또한 거래시의 편의와 돈 뒤에 붙는 "0"의 개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부분에서도
효율성이 제고됩니다. 더불어 화폐 단위의 명칭까지 변경된다면, 불법적으로 조성된 지하자금도
밖으로 나올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의 돈의 명칭이 '원'에서 '환'으로 바뀐다면
기업들의 비자금이나 불법 사채, 도박장 등 꼭꼭 숨어있던 검은 돈들은 어쩔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원화(구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환화(신권)로 변경되면, 구권인 원화는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중에라도 환화(신권)로 은행에서 바꿀수는 있겠지만, 자금출처나 각종 세금에 대해서는 단단한 각오를 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전국의 모든 ATM기기와 금융기관의 모든 전산시스템을 변경해야 하고, 새로운 화폐제조에 대한 비용과
낮아진 화폐 단위로(▶ 화폐가치가 하락하는 것이 아닙니다! ~ 단위만 일정 비율로 줄어든 것입니다.) 인한
물가상승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 다시말해, 현재 우리나라의 화폐단위를 "100대 1"의 비율로 변경한다면
1만원이 100원으로 바뀌게 되는데 ... 그렇다면 9,900원 피자는 99원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가격이 99원이 아닌 100원으로 1원 올라 재설정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이것을 흔히 "우수리 절상효과" 라고 함)
따라서 리디노미네이션은 물가를 상승시키는 영향이 있습니다.
"신혼부부를 위한 전망좋은 아파트 ! ~ 500만원!" ... 어떻습니까?
실물자산이 상당히 싸보이지 않습니까? (▶ 사실 이 부분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 << 한국의 통화개혁 역사 >> ◆
한국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53년 2월과(1차 통화개혁),
1962년 6월(2차 통화개혁)의 2차례 화폐에 대한 개혁이 있었습니다.
이들 1.2차 통화개혁은 인플레이션 대책으로 단행된 통화개혁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목적과 화폐단위절하율, 예금봉쇄율 등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먼저 1차 통화개혁(1953년 2월) 때에는 신권과 구권의 통용가치절하율이 100대 1 이었습니다. 즉,
100원을 1환으로 변경하였으며, 2차 통화개혁(1962년 6월)에서는 10환을 1원으로 변경하였습니다.
[ @ 1차 통화개혁 - 1953년 2월, 신구화폐 환가비율 100대 1 ]
당시의 상황은 한국전쟁으로 전국 대부분의 공장 등은 문을 닫아 생산활동이 정지가 된 상태였고,
전쟁 때문에 거액의 군사비가 지출되어 통화증발이 지속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통화증발은 돈이 계속 늘어난다는...즉, 돈의 발행을 계속 증가 시킨다는 뜻입니다) ... 따라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증폭되고 있었고, 그러던 중에 1953년 휴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UN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UN군 자체의 운영자금과 UN군 참전군인 개개인들의 사용자금을
우리나라 돈으로 빌려주게 됩니다. 그들도 우리나라 영토내에서 최소한 먹을거리나 술한잔 이라도 하려면
우리의 원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더불어 UN사령부를 운영하는데 심부름꾼 하나라도 한국사람을 쓰게 된다면
급여를 원화로 지급해줘야 합니다.
아무튼 1950년 7월 26일 UN군 사령부는 한국정부와 [주한 UN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여
1955년 8월까지 한국정부로부터 누계 약 2억 7000만달러($)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통화를 빌려쓰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빌려쓴 돈의 총액중 1할(10%)은 한국측이 부담하기로 하였으며, 잔액은 전부 당시의 공정환율로
1951년에서 1955년에 걸쳐 상환받았습니다. 이렇듯 당시의 한국은 UN군에 대한 대여금과 그에 대한 상환, 그리고
소위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부흥계획과 미국의 경제원조 전망이 호전되면서
정부와 한국은행은 과잉 구매력을 흡수하고 재정·금융 및 산업활동을 안정통화의 토대 위에 올려 놓는 한편,
채납국세 및 연체대출금의 회수도 아울러 도모한 긴급통화·금융조치를 단행하게 됩니다. 다시말해
상당한 수준의 통화증발(돈이 늘어남)로 인한 인플레압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1953년 2월 15일을 기하여
모든 원화 통화의 유통을 금지하고 화폐단위를 100분의 1로 줄여서 새로운 화폐인 '환(圜)화'를 발행하는 한편,
2월 25일 까지 자연인과 법인이 소지한 원화와 원화표시 지불지시를 금융기관에 맡기게 하고,
2월 14일 전의 금융기관에 대한 일체의 채권·채무도 동시에 신고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생활비에 한해서 1인당 5만원까지 예전돈 100원(구권)을 신권 1환으로 교환하게 하고,
그 밖의 일체의 예금에 대해서는 지불을 금지하였습니다. 즉! 돈을 500환까지는 생활비로 교환가능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찾지 못하게 예금을 봉쇄한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이러한 예금봉쇄 조치는
27일 국회에서 다시 수정을 본뒤 공포.시행 됩니다. ... 간단하게 정리하면
예금중 일정한 체감률을 정해서 자유계정으로 분류합니다. 이렇게 자유계정으로 분류된 예금의 돈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찾아쓸수 있었고, 나머지 자유계정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중에서
4분의1은 "3년특별국채저금계정"으로, 4분의 3은 "2년특별정기예금" 으로 분류되어 봉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금융조치로 인하여 체납국세와 연체대출 상환금 및 봉쇄예금등의 규모가
약 22억환으로서 원래 목표였던 30억환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다시말해
당시의 정부는 30억환 정도를 꽁꽁 묶어두어 시중에 유통되지 못하게 하려했는데, 22억환 밖에 묶어두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원인은 국회에서 정부의 당초 봉쇄율을 수정.완화 하였기 때문입니다. ... 이같은 1차 통화개혁은
당초의 인플레이션 압력과 경제기조를 안정시키는데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 2차 통화개혁 - 1962년 6월, 신구화폐 환가비율 10대 1 ]
5.16 쿠데타 후, 박정희 정부는 1년동안 전례없는 돈을 추가공급하게 되는데,
이렇게 통화량이 누적되고, 이것이 구매력과잉과 투기성자금으로 흘러들어갈 가능성도 있게되자,
여기에 과거 정권에서 축적된 검은돈들도 상당할 것이라는 판단과 맞물리면서,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묶어서 봉쇄한 다음
이 돈을 장기산업투자자금으로 활용하려는 생각과 함께 인플레이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려는 생각으로
두 번째의 긴급통화.금융조치를 시행하게 됩니다.
먼저 1962년 6월 10일을 기하여 모든 "환" 통화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화폐단위를 10분 1로 줄여서
새로운 화폐인 "원"화를 발행하게 됩니다. 또한 이 기간중에 생활비와 의료비 및 장례비 등에 한해서
생활비는 1인당 5,000환까지, 의료비는 실비, 장례비는 5만 환까지, 구권 10환 대신 1원으로 교환하고
그 밖에는 일체의 환화예금에 대하여 지불을 동결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모든 거래 및 환화표시 금전채무는
10:1 의 비율로 절하되어 그 단위가 환으로부터 원으로 개칭되게 되었습니다.
다만 액면 50환 이하의 소액권 및 주화는 당분간 액면가치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원표시의 은행권 또는 주화로 신권과
병행 운용하도록 하였으며, 또 6월 15일 법의 일부 개정에 따라 10만 환 이하의 구권 및 재래예금은
전액 환가비율에 의하여 신권으로 지불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2차 통화개혁은 구권과 재래예금의 구별없이 봉쇄계정으로 전환되는 순간
돈을 영구히 찾지못하게 하었습니다.(영구동결) 물론 자유계정으로 분류된 계정도 존재하기 했었지만,
그래도 1차때는 봉쇄계정 이라고 하더라도 3년(3년특별국채저금계정), 2년(2년특별정기예금) 등의 기한이 존재했었지만,
2차 개혁때는 한번 봉쇄계정으로 지정되면 돈은 영구히 찾지 못하는 상황 이었습니다.
다만 2차통화개혁이 실시되었던 그해, 1962년에 설립 예정이었던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전환만 허용 되었습니다.
즉! 봉쇄계정의 돈은 찾을수가 없었지만, 산업개발공사의 주식전환은 허락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2차개혁의 예금봉쇄 규정은 봉쇄율의 균형과 금융기관의 공신력을 크게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6월 30일 법의 조항을 개정하기 시작하면서 그 후 7월 13일 "긴급금융조치법에의한 봉쇄예금에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되면서
사실상 봉쇄예금에 대한 동결은 전면적으로 해제가 됩니다. 다시말해 이것은
부동자금을 장기산업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정부가 이와같은 판단을 하게된 것은 과거정권의 검은돈과 부동자금 또는 기대성자금 등이
정부의 예상보다 한참이나 떨어졌기 때문인데 ... 사실 2차 통화개혁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장기산업자금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시행에 있어서
그 타당성이 상당히 빈약했다고 평가할수 있습니다. 결국은 실패로 끝난 2차 통화 개혁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으며, 유통과정을 경색하게 만들었고, 기업과 국민경제에 혼란만 가중시켰습니다.
더불어 통화가치에 대한 불신과 심리적 영향으로 물가의 자극요인도 있었습니다.
끝으로 통화개혁의 범주에 포함시키기에는 부족하지만 ....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되자마자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때에 한국은행이 금고에 보관중이던
'조선은행권'이 북한에 의해 탈취되면서 남한 경제가 한때 상당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상황이 이쯤되자 한국은행은 긴급히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한국은행권'을 새로 제조하여
1950년 7월 22일에 최초의 '원(圓)'표시 '한국은행권'을 사용하면서 시중에 떠도는 북한이 탈취한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해주면서 경제를 안정시키게 됩니다.
(일부에서는 이때를 한국최초의 통화개혁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동전을 사용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화폐 단위가 축소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1원, 10원, 100원 ... 등의 화폐 단위(동전 단위) 사용이 줄어들면서 앞서 언급했던 우수리 절상효과(물가상승)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 현재 국내 경제가 디플레이션을 우려해야 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이번 한국은행의 동전없는 사회로의 방향설정이 일부에서는 지지를 받고 있는것 같습니다.
핀테크와 모바일 결제, 전자상품권 처럼 화폐의 디지털화가 실물화폐의 자리를 넘보는
과도기적 시기임은 분명해보입니다 ... 하지만 급격한 변화는 항상 보이지 않는 불안을 내포합니다.
인간이 발명한 라디오는 ... "라디오" 그 자체로서는 가치중립적이었지만
그것을 나치당이 사용했을땐 위험한 "선전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디지털화폐는 인류의 기술진화의 과정중에 탄생한 매우 훌륭한 가치중립적 도구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가치중립적 도구가 (곧 다가올)미래사회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질 것인가를
생생하게 목도하게 될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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